《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 역사학자 4인의 문명 비교 탐사기 -2 (2024)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 역사학자 4인의 문명 비교 탐사기

몽골의 역참제, 유라시아를 연결한 ‘점(點)’의 네트워크(김호동)

- 교통은 길을 전제로 한다. 도로망이 없는 교통은 생각하기 어렵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대한 영역을 통치한 제국들은 도로망을 정비했다.

- 그러나 몽골인들은 고정된 ‘길’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던 유목민이었다.

몽골인들이 열심히 도로를 건설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 흥미로운 사실은 제국의 교통을 위해 몽골인들이 건설했던 것은

도로가 아니라 역참이었다.

중요한 노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역참을 배치했다.

이 역참을 몽골어로 ‘잠(jam)'이라고 하는데,

아무나 돈을 내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공무로 여행하는 전령이나 관리 혹은 외국의 사신들에게만

사용이 허가되었고, 이들은 반드시 패자(牌子)라는 증명서를 보여 주어야만 했다.

- 그러나 몽골 제국의 역참제와 다른 중국 왕조의 역참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중국 왕조의 역참제는 기본적으로 도로를 전제로 성립한 것이고

역참은 도로망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고안된 것인 반면,

몽골의 역참제는 원래 도로가 존재하지 않는 초원에서 처음 도입된 것이기 때문에

도로는 이차적인 중요성밖에 지니지 않았다.

- 다른 국가의 역참제가 도로를 근간으로 한 ‘선(線)’의 네트워크였다면,

몽골 제국의 역참제는 도로가 존재하는 농경 지역은 물론

도로가 존재하지 않는 사막과 초원까지도 포함하는 ‘점(點)’의 네트워크였다.

- 몽골인들이 만들어낸 이 체제는 상황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녔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에 전쟁이 발생하면

그곳을 피해 우회하는 곳에 역참을 배치하여

새로운 교통망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로망에 의한 역참제의 경우 도로를 옮길 수 없다)

- 21세기 기술과 정보 혁명을 주도하는 인터넷과 이동통신이야말로

‘점’의 네트워크의 현대적 구현이라고 보면,

우리는 말과 활이 아니라 휴대폰과 노트북으로 무장한 현대적 유목민이 아닐까?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에서도 똑같은 주장을 한다)

공간의 확대와 연결(한정숙)

- 러시아가 유라시아 초원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몽골 제국의 지배를 극복한 후 역으로 그들의 영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였다.

- 러시아어로 마부를 ‘얌쉭’이라고 하는데,

몽골 제국의 교통 체제였던 ‘잠’, 곧 역참의 러시아어형인 ‘얌'에서 나온 말이다.

-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칸에게 공(公)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킵차크한국의 수도까지 다녀와야 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카라코룸까지 가서 대칸을 알현해야 했다.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러시아인들이 처음으로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 몽골인들이 발전시킨 역참제는 러시아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원래 러시아인들에게 공간을 잇는 교통망으로 중요했던 것은 수로였다.

몽골 지배기에 러시아 내에서 광대한 공간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역참제의 중요성은 숙지되었으나,

거대한 ‘교통 혁명’을 주도할 만큼 재정 능력을 갖춘 권력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 정작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역참제가 도입된 것은

몽골 지배를 극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몽골 지배 종식을 선언한 1480년 무렵부터

역참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의 역참제는 신속히 확대되어 나갔다.

러시아가 킵차크한국의 영토을 차지하고,

나아가 시베리아까지 정복한 후에는 새로운 영토에도 속속 역참이 설치되었다.

부역(附逆)과 저항 사이: 모스크바와 노브로로드(한정숙)

- 노브고로드(new city라는 뜻)는 민회의 권한이 강한

상인 과두정을 형성하고 있던 도시 국가로,

발트해에 가까이 있어 서유럽 사회와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수로 교역망의 중심지로 수세기 동안 번성했다.

- 이에 반해 모스크바는 1147년 수즈달 공령의 통치자였던

유리 돌고루키의 별장촌으로 세워진 이래

오랫동안 한산한 시골로 머물러 있다가 몽골 지배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 13세기 후반부터 모스크바는 블라디미르 대공인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막내아들의 영지가 되었다.

※1257년 세금을 징수하러 온 몽골인 관리에 대한 노브고로드의 봉기를 진압하고

킵차크한국의 세금징수 편의를 적극 도모해 주었던 사람이 알렉산드르 넵스키.

넵스키는 1240년 네바 강가에서 스웨덴의 침공을 격퇴한 공로 덕에

넵스키(‘네바 강의’라는 뜻)라는 칭호를 얻었다.

- 모스크바의 성장은 킵차크한국 칸들에 대한 모스크바 공들의

적극적인 협력 정책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모스크바의 군주들은 세력이 성장하는 동안

몽골 지배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억압하면서

몽골 칸들에게 철저하게 굴신하는 자세를 취했다.

대공들은 칸의 신임을 바탕으로 군사력, 행정력을 강화하면서

영토 확대 정책을 계속해 나갔다.

- 그러나 모스크바 대공들은 러시아 내에서 확고한 1인자가 되고부터는

킵차크한국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했다.

(부역자들이 독립투사가 된 것 같은 기회주의적 행태다)

- 모스크바 대공이 노브고로드의 자치권을 박탈하기 위해

토착세력을 박멸하면서 노브고로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현재까지도 소도시로 주저앉고 말았다.

아드리아 해의 여왕, 베네치아(최갑수)

- 베네치아는 게르만족의 이동이 끝나 가던 6세기쯤 탄생.

697년 최초로 최고 행정관인 ‘도제(doge: 총독)’를 선출한 이래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놓일 때까지

1100년간 공화국 체제였다.

- 베네치아는 14세기에 이르러 강력한 경쟁자인 제노바를 누르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바로 13세기 중엽에 동서 교역로에 변화가 일어난다.

- 최근까지 유럽 역사가들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지중해 교역망이

중동을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는 훨씬 더 크고 부유한

세계 교역망의 일부분임을 알지 못했다.

베네치아는 이 거대한 교역권의 한쪽 끝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윤을 올렸지만,

그것은 실상 13세기 중반에서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세계 경제 번영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과 명 제국 질서(박한제)

- 1405년 명 영락제(永樂帝)의 출항 명령을 받은 정화는

장병 2만 7,800명을 62척의 대선에 분승시킨 방대한 대함대를 이끌고

남경을 출발했다.

이후 28년 동안 1차와 거의 같은 규모의 선단을 이끈 정화는

모두 7차례에 걸쳐 인도 서해안, 아프리카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항해 거리 총 10만해리(18만 5천km)의 ‘남해(南海)’ 원정을 감행했다.

- 페스트는 본래 운남(雲南) 지방의 고유한 풍토병으로

이 지방을 지배한 몽골인들의 말안장에 그 균을 보유한 벼룩이 기어들어가

초원 지대를 나오게 되었고,

14세기 전반 몽골 제국의 대교역망을 통해

중국․동유럽․북미․서유럽 등지에 퍼져 급격한 인구 감소와 사회의 황폐화를 초래했다.

- 정화는 원나라 시대 동서 무역과 국가 경제를 장악했던

색목인(色目人) 출신 환관이었다.

- 몽골이 지배하던 시기의 중국은 정크(junk) 교역의 최성기였다.

이 시기에 실크로드 대신 원제국과 우호적인 일한국을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가 최성기를 맞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화의 남해 원정은 몽골 시대가 바다에 일으킨 파동의 마지막 물결이었다.

- 정화의 함대는 전투․탐험․통상 등의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한 함대로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것이었다.

중국 역대 왕조가 항상 그랬듯이 여러 나라들에 은혜를 베풀고

그들의 질서에 동참을 강요하는 사신들의 행차에 지나지 않았다.(조공무역)

시베리아의 정복자들 : 스트로가노프 가문과 예르마크(한정숙)

- 시베리아를 러시아어로는 ‘시비르’라 하는데,

이는 원래 시베리아 타타르인의 한국(汗國)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 시베리아를 러시아인들이 본격적으로 정복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부터였다.

- 시베리아 정복 초기의 주역이 바로 스트로가노프 가문과 예르마크 찌모페예비취다.

- 1552년 우랄 산맥 서쪽의 카잔한국이 러시아 영토가 됐다.

그러나 짜르에 복종할 것을 약속한 카잔한국의 통치자 에디게르의 후계자는

조공 납부를 거부하고 러시아를 공격했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당시 그 지역에서 염전업, 광산운영, 모피 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노브로로드 출신의 상인 기업가 집안인

스트로가노프 가문이었다.

-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그동안 대공이나 짜르들이 재정난에 부딪칠 때마다

거액의 돈을 빌려 주는 등 모스크바 중앙 권력에 긴밀히 협조한 대가로

면세 특허권을 얻어 사업 영역과 영지를 넓혀 났다.

이 집안의 관할 구역은 독자적 행정 조직과 사법적 특권까지 갖고 있었으므로

중앙 권력에 대해 일종의 ‘가신국가’와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 스트로가노프 집안은 위구르인들을 비롯, 이민족들의 잦은 습격에 대항코자

요새 시설을 갖춘 도시를 건설하고 이민족을 먼저 공격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시비르한국의 공격을 받자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아예 시비르한국을 없애 벌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휘하에 숙련된 전사가 없었다.

동남부 초원 지대의 카자크 두목(아타만)인 예르마크가 주목받은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 카자키(개개인은 카자크로 표기)는 남부, 동남부 초원 지대 등지에서

자치권을 가지고 살면서 변방 수비를 담당하던 특수한 집단으로,

원래 중앙 정부와 지주의 속박을 피해 러시아 변경으로 달아난

개척자·탈주 농민·범죄자 등이 카자키의 주류를 이룬다.

(영화 ‘대장 부리바’가 바로 카자키 이야기)

- 러시아 민요에는 예르마크가 투르크 술탄의 감옥에 갇힌 적도 있고

카잔한국의 정복에도 활약했다고 노래되지만,

실제로는 볼가 강과 돈 강을 오르내리며 노략질하는 해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짜르 이반 4세와 관련된 상인을 습격하는 바람에

노여움을 사 처벌받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 바로 이때 스트로가노프 가문이 예르마크에게 시비르한국을 정벌하라고 제의했고,

이를 예르마크가 수락함으로써

마침내 1582년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의 막이 올랐다.

- 비적을 고용했다고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대해 격노했던 짜르는

예르마크의 승전보에 환호했다.

- 시베리아 정복 과정은 비교적 동일한 패턴의 반복이었다.

정복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모피’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담비와 흑담비 같은 동물의 모피는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어 대단히 비싼 값에 판매되었다.

- 시베리아를 장악한 후 러시아인들은 도시를 세우고, 정교회를 건설하고,

유럽 지역 농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이곳은 유형의 장소로 선택되었다.

제정러시아 시대의 정치범이나 범죄자들만 시베리아에 유배 생활을 한 게 아니다.

-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서의 교류가 아니라

일방적 정복과 지배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백인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 정복 과정과 비슷하다.

다만 북미 대륙과 비교한다면 러시아인과 토착민의 통혼을 통한

인종적 혼합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이번 챕터는 좀 길게 요약했는데, 앞서 《제국의 통로》p267 '유배자들‘

이라는 부분에 시베리아 개척에 대해 간단하게 나온다.

장성(長城)과 명의 쇄국주의(박한제)

- 장성은 농업과 유목의 분계선인 동시에,

농경 한족이 북방 유목 민족의 침략을 막는 방어선이다.

- 중국 전근대사는 한마디로 유목 민족과

농경 민족 간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 진시황의 장성 수축이 어느 정도 중국의 힘을 표현한 것이라면,

명대 장성의 중수는 중국 문명의 실패와 퇴영을 상징한다.

- 장성은 칼과 창, 활 등의 병기를 사용하는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효용성이 줄어들었다.

장성 축조는 많은 인력과 물력을 소비한 결과

농민 반란의 빌미를 제공하였을 뿐,

정작 단련된 만주족 팔기병 앞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 장성은 또한 일자형 성이기 때문에 한 곳만 뚫리면 성으로서써 의미가 없게 된다.

게다가 명나라 때는 화포 등 화기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성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효용성은 갖기 힘들었다.

군제 변화와 러시아 농민의 농노화(한정숙)

- 대부분의 러시아 농민들은 서유럽에서 농노제가 유지되고 있던

14~15세기 이전까지는 오히려 상당한 인신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농민들이 법적 예속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이미 철폐되었거나 철폐되어 가고 있던

15~16세기부터였다.

- 러시아에서 농노제의 성립은 몽골 지배를 극복하고

킵차크한국의 후계 국가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군제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몽골 지배 이전 러시아의 주요 병력은 공(公)들의

무장 수행인 집단인 드루지나였다.

드루지나는 공으로부터 현물이나 현금으로 급여를 받았으며,

자신이 섬기던 공을 떠나 다른 공에게 봉사할 수도 있었다.

드루지나는 주로 기병이었고, 주로 도시 민병대로 구성되는 보병이 이를 보충했다.

- 러시아 군제는 몽골 군대에 대응하기 위해

바로 그 몽골 군제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변화하였다.

그에 따라 보병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기병대의 의미가 훨씬 커졌다.

- 몽골 지배 이전인 12세기 후반부터 러시아의 드루지나는 분화하고 있었는데,

그 상층은 ‘보야린’이라 불리는 특권적 혈통 귀족으로 변하여

토지를 세습적으로 소유하며 스스로 드루지나를 거느렸고

공들에 대해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 반면, 하층 드루지나는 여전히 공들에게 봉사하면서 급여로 살았다.

이들은 ‘드보르’(개개인은 ‘드보랴닌’이라 칭함)라 불렀다.

- 러시아의 통일과 독립 과정에서 혈통 귀족층의 충성심을 믿지 못하게 된

모스크바 대공과 짜르들은 드로랴닌 층을 집중 육성하게 되었다.

특히 몽골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새로 등장한 국경 수비 과제와

늘어난 행정 수요는 드보랴닌 층의 증대를 요하였다.

- 짜르 정부는 군사·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드보랴닌에게 토지를 수여하고

이 토지에 거주하는 농민 노동력을 무상으로 이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군관직 종사자들은 급여 토지 보유자란 의미에서 ‘포메시치키’라고 불렀다.

- 국방의 새로운 주역이 된 중소 포메시치키의 보유지는

대개 농민 5~6호 정도 규모로 영세했으므로

농민 생활이 대지주 소유지에서보다 더 어렵고

농민 착취의 정도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러자 농민들은 포메시치키 토지를 떠나 대지주에게 옮겨가거나

아예 변경 지대로 도주했다.

포메시치키들은 정부에 대해 농민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

또는 금지시켜달라고 호소했다.

짜르 정부는 이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차츰 농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농민이 도주한 경우 추적하여 잡아올 수 있는 권리를 토지 보유자에게 부여하였다.

이른바 ‘추쇄(推刷)’의 시효는 1649년 법전에서

아예 철폐돼 영구히 농민은 토지에 붙박히게 되었다.

- 국방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토지보유제가 창설되었고,

농민의 농노화는 이로 인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서구에서 총포·화약의 등장과 사회 변동(최갑수)

- 화승총이 발달하여 전투의 승패를 가릴 정도의 위력을 갖게 된 것은

겨우 16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 대포가 기동력을 갖추어 유목민들의 군사적 우위가 종식을 고하게 되는 것은

17세기 후반이 지나서였다.

- 유럽만이 대포를 가졌던 것도 아니었지만,

유럽의 우위는 대포에 기동력을 부여함으로써 나타났다.

- 1860년대 기관단총의 등장, 비교적 가벼운 이 신무기가 등장한 이후에야

유럽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미국에서는 토착 인디언을 제압할 수 있었다.

우리의 경우 동학 혁명군이 일본군에게 격멸당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그러기에 제국주의 열강은 어떤 지역을 장악하면

철도를 놓는 사업부터 먼저 했다.(대포를 운반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때쯤이면 그들의 군사적 우위는 최종적으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 유럽과 중국이 근대적인 무기 체계의 모든 것을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유럽만이 그처럼 독특한 우위의 요소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 그것은 다름 아닌 유럽의 독특한 국가체제,

특히 군사 체제를 시장 경제와 결합시켰던 독특한 사회 체제 때문이었다.

유럽은 중세 이후 만성적인 ‘전국(戰國) 상태’를 보였다.

결코 하나의 정치 세력이 유럽을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정치 세력간의 격렬한 경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 다른 하나는 상인과 도시였다.

이들은 군사적 경쟁 상태 속에서 독자적인 방어 기제를 갖추어야 했고,

그것도 소수 인적 자원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해야 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직업적 용병의 출현이다.

14세기 중엽 극심한 빈부 차이로 시민군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이탈리아 북부 도시 국가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온 군사적 무뢰배들을

마침내 길들이는 데 성공하여 용병에 의한 상비군제를 15세기 중반기에 정착시켰다.

- 근대에 들어서 유럽이 내부적으로 격렬한 정도의 군사화를 경험하면서도

군대가 아닌 민간 세력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독특한 상황은

이렇게 해서 나타났던 것이다.

신유학의 전개와 오래 종교의 수용(박한제)

- 명대 276년간(1368~1644)은 인류 역사상 정치 질서가 잘 유지되고

사회가 안정되었던 시기 중 하나였다.

청대 267년 동안(1644~1912)에도 근본적인 변화 없이

안정이 계속 유지되는 저력을 발휘했다.

- 이 놀랄 만한 안정이 유지되었던 바로 그 시기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신세계’로의 평창,

뒤를 이어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등 실로 역동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이 긴 기간에 중국인들이 향유한 고도의 정치적·사회적·정신적 안정은

같은 시기 유럽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혼란보다

현상적으로 더 나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 혼란을 수습한 서약의 강습 앞에 19세기 중국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 이처럼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외국인들로 하여금 중국은 언제가 ‘불변’이라는 신화를 갖게 하는 데

기여한 것이 바로 전통 유가 사상의 재생품인신유학(性理學)’이었다.

- 신유학이 강조하는 다섯 가지 인간관계(五倫) 대부분은 권위와 복종의 관계였다.

이것이 후세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초안정 시스템’을 구축하는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 신유학은 조선에서 더욱 철저하게, 그리고 교조적으로 사회체제를 지배했다.

- 전통적인 유가 사상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북방 이적과의 싸움에서 오랫동안 패배함으로써

중국인들의 시선이 안으로 돌려지게 된 점이고,

또 다른 요인은 과거 제도가 정착되고 관료 제도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중국의 전통적 정치 이상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신감이었다.

이슬람 세계의 확대(김호동)

- 몽골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에 이슬람은

중근동의 지역적 한계를 넘어 유라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 이슬람이 이처럼 확대될 수 있었던 요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인들의 역할이었다.

‘팍스 몽골리카’는 그 전까지 관계가 소원했던 지역들 사이의

경제적 교류를 활성화시켜, 지중해 연안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육상은 물론 해로를 통한 원거리 교역이 발달했다.

무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단일한 화폐 단위도 통용됐다.

- 중국에서 소위 ‘알탈 상인’(斡脫商人)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국제상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었고,

‘알탈’이라는 말도 ‘동업자’를 뜻하는 ‘오르탁(ortaq)'이라는

투르크어에서 나온 것이다.

- 몽골 귀족과 무슬림 상인들 사이의 이 같은 ‘정경 유착’이

결국 몽골 제국 지배층의 이슬람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이슬람의 성공을 가져온 또 하나의 요인은

이슬람 신비주의 운동의 확산이었다.

《꾸란》은 번역이 금지되어 있고, 오랜 수업을 거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소수의 엘리트만이 이를 독점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것이 신비주의 운동인데,

이 운동의 뿌리는 금욕과 고행을 행하며

절대신 알라의 존재를 스스로 직접 체험하려는

사람들(수피 sufi)에게서 나왔지만

후일 유명한 수피들을 중심으로 교단이 형성되면서 대중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 수피 교단은 어려운 교리 설명이나 해석이 아니라,

금식과 수련 그리고 구휼과 치유를 통해 대중들에게 접근했다.

더구나 ‘학문적’ 접근을 기피하는 수피들은

각지의 토속 신앙을 흡수하고 수용했기 때문에

비아랍계 민족들의 개종을 더욱 용이하게 했다.

- 무슬림 상인과 신비주의 수피 교단의 활동에 힘입어

몽골 제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이슬람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 이슬람의 확산은 몽골 제국 영내에서 다른 종교의 쇠퇴를 가져왔다.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 정교의 발전(한정숙)

- 정교회는 로마 교회와 달리 선교·예배·성경 번역 등

종교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서 민족 고유어를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택하고 있었다.

- 종교활동이 자국어로만으로 충족되자 러시아인들은 동로마에 보존된

다른 고전 고대 문헌에는 관심을 쏟지 않았다.

서구와 달리 러시아가 르네상스를 겪지 않은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대신 러시아 문화는 독자적 성격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 몽골 지배 아래서 러시아 정교는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발전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반감이 자기 정체성의 종교적 표현인

정교에 대한 존중과 애착으로 연결되었음은 당연하다.

몽골 제국의 관용적 종교 정책도 정교의 세력 강화에 기여하였다.

- 킵차크한국은 이슬람을 받아들였지만,

러시아인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교회와 그 성직자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었다.

몽골 지배 하에서 특히 활기차게 전개된 것은 수도원 건설이다.

- 몽골 지배기 이래 정교회는 모스크바 정치 권력과 밀착되면서,

국가를 강화하는 데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러시아 정교회 수장은 키예프 수좌대주교였는데,

몽골의 키예프 점령 이후 수좌대주교들은 블라디미르 대공의 보호를 구하게 되었고,

블라디미르 대공좌(大公座)가 모스크바로 옮겨감에 따라

정교회 수장의 축복도 모스크바 군주의 머리 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 러시아 정교회는 144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재가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모스크바 수좌대주교를 선출함으로써 독립수장 교회가 되었다.

이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으로 절박한 위기에 처한 비잔티움 황제가

서방의 군사적 도움을 얻기 위해 로마교회-정교회 통합에 동의한 것에 대한

러시아측의 반발의 결과였다.

- 16세기초에 체계화된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이념은 자부심의 집약체였다.

원래의 로마는 ‘이단’인 교황의 수중에 있고,

두 번째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교회와 통합을 추진하다

벌을 받아 멸망했으니,

진정 올바른 믿음의 수호자는 ‘제3의 로마’이자

혁신된 로마인 모스크바뿐이라는 주장이다.

- 이 주장은 모스크바 군주권의 강화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몽골 지배를 극복하고 영토의 무한 팽창에 나선

러시아인들의 선민 의식을 극대화했다.

서구 기독교 교회의 변화(최갑수)

- 현존하는 고딕 양식 건축물의 대표작들(아미앵, 랭스, 샤르트르, 파리, 루앵)은

모두 몽골인들이 동유럽을 휩쓸던 시기를 전후하여 초석이 놓여졌으며,

신과 영원을 향한 덧없는 인간들의 염원과 함께 종교 권력,

특히 교회 권력의 위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봉건제의 본고장인 파리 지역의 문화적 우위를 보증하는

고딕 양식의 전성기와 유럽의 정체성의 종교적 토대를 마련한

교황권의 절정기가 일치한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 이전까지 가톨릭의 기본적인 종교단위는 주교구였다.

이때까지 가톨릭에서 종교적 계서제는 부재하였다.

로마의 주교를 포함한 종교적 수장들의 선임권은 세속 제후들이 장악하였다.

성직자들의 도덕적·지적 수준이 낮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 11세기 중엽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로 대표되는 ‘교회개혁’은

도시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회 세력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임명권을 누가 장악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보고 주교에 대한 서임권을 놓고 황제와 대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장에 큰 활약을 한 것은 수도원장들이었다.

- 수사-교황이 매우 드문 교회사에서 1073년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모든 교황이 수사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수도원 운동이 교황권의 확립에 그만큼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 가톨릭 교회가 독자적인 계서제를 설정하고

13세기에 여러 세속 군주들에게 자못 우위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일시적으로나마 절묘한 상황이 조성되었던 결과다.

- 즉 교황의 가장 강력한 경쟁 세력인 신성로마제국 황제권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그 힘의 공백을 국민 국가의 원형이랄 수 있는 영방국가가

아직 메우지 못했던 틈새에서 로마 교회가 ‘국가 안의 국가’이자

‘국가 위의 국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사의 비결 중 하나인 국가-시민사회라는 이중 구조의 기본틀은

이렇게 해서 나타났다.

-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 교황청은 12세기에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1130년대에 이르러 교황을 선출하고

또 그의 특사 역할을 하는 ‘추기경단’이 등장한 데 이어,

독자적인 행정기구인 ‘로마 교황청’이 마침내 출현한 것이다.

- ‘보편적인 기독교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절정기 교황들이 구사했던 도구는

십자군과 개혁이었다.

‘개혁’을 향한 교회의 열정은 ‘이단’을 만들어 냈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내부 개혁과 십자군 및 종교재판이 출현하였다.

○ 차례(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퍼옴)

머리말

1. 동서 문명의 십자로 이스탄불

'동양'이란 무엇인가?

'서양'이란 무엇인가?

'선(線)'이 아닌 '면(面)'으로서의 실크로드

동서 문명의 십자로 이스탄불

2. 중세 사회의 세계 인식

- 유라시아 세계 형성 이전 각 문명권의 세계관

중화주의:중국인의 신화와 현실

유목민의 다원적 세계관

동슬라브인들의 지리적 교류 범위

중세 사회의 세계 인식:유럽의 탄생

3. 중세의 도시들

- 일상의 삶과 정치, 중세 도시의 모습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하고 있었다

사마르칸드의 영광

샹파뉴 지방의 정기시들

키예프 시대의 도시들

4. 몽골 제국의 출현과 그 충격

몽골 세계 제국의 탄생

몽골의 중국 지배가 남긴 것

모노마흐의 왕관

몽골 제국의 출현과 로마 교회의 대응

5. 유라시아를 잇는 교통망의 변화

- 13세기의 세계 체제

몽골 제국의 출현과 해상 교통

몽골의 역참제, 유라시아를 연결한 '점(點)'의 네트워크

공간의 확대와 연결

중세 유럽에서 지리적 지식과 지도

6. 일상생활의 변화와 도시 문화

- 유라시아 도시들의 과거와 오늘

사라진 초원 도시 카라코룸

대원 제국의 수도권 운영과 상도(上都)와 대도(大都)

부역(附逆)과 저항 사이:모스크바와 노브고르드

아드리아 해의 여왕, 베네치아

7. 동서를 이어 준 사람들

- 장벽을 넘은 수도사와 상인, 정복자들

카르피니와 루브룩, 아시아를 찾은 첫 유럽인들

'팍스 몽골리카'의 산물『동방견문록』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과 명 제국 질서

시베리아의 정복자들:스트로가노프 가문과 예르마크

8. 전쟁과 사회 변동

장성(長城)과 명의 쇄국주의

유목민과 기마전

군제 변화와 러시아 농민의 농노화

서구에서 총포.화약의 등장과 사회 변동

9. 종교적 대립과 교류

- 유라시아의 여러 종교들과 그 상호 관계

신유학의 전개와 외래 종교의 수용

이슬람 세계의 확대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정교의 발전

서구 기독교 교회의 변화

10. 유라시아 세계의 변화와 발전

- 새로운 정치.사회.경제체제, 새로운 삶의 방식들

중화 세계의 폐쇄적 세계관

몽골 제국과 세계 인식의 변화

러시아의 영토 확장과 제국의 형성

서구인들의 해양 진출과 새로운 세계 체제의 형성

맺음말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 역사학자 4인의 문명 비교 탐사기 -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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